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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안목이란: taste를 취향이 아니라 안목으로 옮기는 이유

taste를 취향으로 옮기면 책임이 사라집니다. 안목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과대평가 논란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훈련하고 기록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Sik · · 7분 읽기 ·

영어권 디자인 글에서 taste라는 단어가 부쩍 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로 올 때 대부분 '취향'으로 번역됩니다.

이 번역이 어색한 건 아닙니다. 사전적으로는 맞습니다. 문제는 번역 과정에서 책임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취향은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저는 민트초코를 좋아해요"에 대고 "근거가 뭔가요"라고 묻는 건 무례입니다. 그런데 실무에서 시안 두 개 중 하나를 고를 때는 그 질문이 당연합니다. 답할 수 없으면 그건 판단이 아니라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taste를 안목으로 옮기자는 제안이고, 더 중요하게는 그 안목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취향으로 옮기면 사라지는 것

두 단어의 차이를 문장으로 놓고 보면 선명합니다.

취향은 "나는 이 색이 좋아요"까지 말합니다. 안목은 "이 색이 지금 이 사용자에게, 이 브랜드에서, 이 예산으로 왜 더 맞는지"까지 말합니다. 뒤쪽은 틀릴 수 있고, 틀렸을 때 배울 것이 남습니다.

안목은 또한 옵션이 아니라 직무에 가깝습니다. 취향은 남이 반박할 수 없지만, 안목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박 가능하다는 건 진지한 주장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어에 이미 있는 단어라는 점도 좋습니다. 안목은 예술품을 감정하는 사람,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쓰던 말입니다. 둘 다 축적된 기준으로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게 정확히 지금 필요한 능력입니다.

안목은 예쁨의 순위가 아닙니다

가장 흔한 오해를 먼저 치우겠습니다. 안목이 좋다는 건 더 예쁜 걸 고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제품 화면은 미적 완성도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글자가 읽히는지, 다음 행동이 보이는지, 낯선 사용자가 실수에서 회복할 수 있는지, 구현과 운영에 견딜 수 있는지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안목은 감각보다 기억에 가깝습니다. 사용자 리서치에서 배운 것, 실패한 실험, 다른 제품을 뜯어 본 경험, 브랜드와 기술의 제약을 동시에 꺼내 놓는 능력입니다. 재능이 아니라 재고입니다.

수치로 본 안목의 자리

2026년 AI in Design 리포트에 흥미로운 분포가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무엇을 AI에게 넘기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 응답자의 약 80%가 시각적 완성도는 AI 제안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답했습니다.
  • 사용자 니즈, 문제 정의, 스토리텔링은 60~70%가 자기 판단에 의존합니다.
  • 반면 76%가 AI 코딩 도구를 쓰고, 50%는 생성된 코드를 프로덕션까지 내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생산은 넘기고 판단은 붙듭니다. 자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넘겨보니 안 되더라는 쪽에 가까울 겁니다.

같은 조사에 불편한 숫자도 있습니다. 9%는 AI의 기여와 자기 기여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결과물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느끼는 응답은 40%에 그쳤습니다.

이 9%가 안목이 무너지는 지점입니다. 안목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쌓이는데, 무엇을 왜 골랐는지 모르면 반복이 축적이 되지 않습니다. 일은 끝나는데 사람은 안 느는 상태입니다.

AI의 평균과 생각의 고착

생성 AI는 익숙한 패턴을 빨리 조합하는 데 강합니다. 대가로 결과가 서로 비슷해집니다.

2026년 AI 생성 랜딩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보면 거의 동일합니다. 보라색 그라디언트, Inter, 둥근 카드, 3열 그리드. 모델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 '많이 있는 디자인'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첫 결과가 사고의 범위를 좁혀버립니다. 디자인 고착(design fix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인데,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이지만 AI 도구가 이걸 구조적으로 증폭합니다. 백지 앞에서는 열 방향을 떠올리던 사람이, 완성도 70%짜리 시안을 받으면 그 시안의 변형 세 개만 생각합니다.

안목은 여기서 구체적인 효능을 가집니다. 첫 안을 거절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도 "별로예요"가 아니라 이유를 붙여서요.

  • "예쁘긴 한데 처음 오는 사람이 이 기능이 뭔지 알 방법이 없어요."
  • "브랜드가 약속한 간결함보다 장식이 앞서 있어요."
  • "오류 상황인데 카피가 너무 단정적이에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걸 확신하는 투로 말하고 있어요."

이 세 문장은 모두 반박 가능합니다. 그게 취향과의 차이입니다.

반론: 안목은 과대평가된 것 아닌가

짚고 가야 할 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첫째, 안목은 쉽게 게이트키핑 도구가 됩니다. "그건 안목이 없는 선택이에요"라는 말은 근거 없이 권위만으로 무엇이든 기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특정 문화권·계층의 미감을 보편 기준인 것처럼 내세우기도 쉽습니다.

둘째, 추상적이어서 평가가 안 됩니다. 채용 공고에 "taste가 있는 분"이라고 쓰면 지원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심사자도 결국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고르게 됩니다.

셋째, 형식만 베끼기 쉬운 개념입니다. Dieter Rams가 "적지만 더 나은"을 말했을 때 그건 절제를 표현할 어휘가 없던 산업 안에서 전후 독일 소비자의 심리를 읽은 결과였습니다. 그 맥락 없이 회색 배경과 여백만 가져오면 그건 안목이 아니라 유행입니다.

반론을 수용하면 결론이 달라집니다. 안목은 가졌거나 없는 질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기준의 집합으로 다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안목은 실제로 계급장이고, 설명할 수 있는 안목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안목을 훈련하는 방법

"좋은 걸 많이 보세요"는 조언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적어보겠습니다.

네 가지 질문을 매번 통과시키기

시안을 본 다음 '좋다/별로다'로 끝내지 않고 이 네 가지에 답해봅니다.

  1. 누구에게 어떤 순간에 쓰이는가
  2. 사용자의 다음 행동을 더 쉽게 만드는가
  3. 브랜드의 말과 시각 언어에 맞는가
  4. 이 선택의 비용과 위험은 무엇인가

네 번째를 빼먹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그게 보통 실무에서 가장 빨리 문제가 됩니다.

주 1회, 제약을 추정하는 연습

좋아 보이는 화면을 하나 골라 "왜 이렇게 됐을까"를 역으로 추정해 봅니다. 어떤 지표를 보고 이 버튼을 위로 올렸을까, 왜 이 정보를 숨겼을까, 어떤 법무 요구 때문에 이 문구가 어색할까.

이 연습이 리디자인보다 훨씬 낫습니다. 리디자인은 제약을 모른 채 예쁘게 만드는 연습이라 오히려 AI가 잘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틀린 예측을 기록하기

안목이 자라는 건 맞혔을 때가 아니라 틀렸을 때입니다. "이 방안이 더 잘 될 거라고 봤는데 아니었다"를 적어두면 기준이 수정됩니다. 적지 않으면 기억이 결과에 맞춰 조용히 재구성됩니다.

안목을 조직의 자산으로 바꾸기

개인 안에만 있는 안목은 그 사람이 나가면 같이 나갑니다. 더구나 에이전트가 화면을 만드는 환경에서는 문서화되지 않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싸게 먹히는 방법은 결정 하나당 세 줄을 남기는 겁니다.

  • 무엇을 골랐는가
  • 무엇을 버렸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 기준은 언제 다시 보아야 하는가

두 번째 줄이 핵심입니다. 채택된 안은 화면으로 남지만 버려진 안과 그 이유는 아무 데에도 남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팀은 이미 기각한 안을 다시 꺼내 논의합니다.

이게 디자인 시스템 문서와 붙으면 더 강해집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는지는 2026년 UX 디자이너 역량 7가지의 시스템 사고 항목에 이어서 적었습니다.

안목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저는 안목이 없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보통은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 판단을 말로 풀어본 적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금방 고쳐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화면을 하나 고르고, 왜 마음에 안 드는지를 두 문장으로 써보면 됩니다. 처음엔 "촌스러워서" 같은 말밖에 안 나옵니다. 열 번쯤 쓰면 "정보 위계가 세 단계인데 시각적으로는 두 단계로만 구분돼 있어서" 정도가 나옵니다.

그 변화가 안목입니다. 감각이 예민해진 게 아니라 언어가 생긴 겁니다.

AI가 시안을 무한히 내는 환경에서 이 언어는 더 빨리 필요해집니다. 열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하루에 여러 번 생기기 때문입니다. 왜 이게 나은지 매번 설명하지 못하면, 선택은 결국 맨 위에 뜨는 것으로 정해집니다.

안목과 취향이 충돌할 때

현실에서 제일 곤란한 상황입니다. 내가 더 좋다고 느끼는 안과, 지금 사용자에게 더 맞는 안이 다를 때입니다.

정답은 싱겁습니다. 제품에서는 사용자 쪽이 이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입니다. 진 취향을 버리지 말고 기록해두세요. "나는 이쪽이 더 좋았는데 이런 이유로 저쪽을 골랐다"를 남기면, 나중에 그 선택이 틀렸을 때 무엇을 재검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취향을 계속 지우기만 하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몇 년간 무난한 선택만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 방향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난함은 안전하지만 안목을 키우지는 않습니다. 틀릴 여지가 있는 선택만이 데이터를 남깁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이렇게 갈라 쓰는 게 편합니다. 사용자에게 직접 닿는 결정은 근거로 하고, 근거가 비기는 지점에서는 취향으로 채우되 취향으로 채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취향을 쓰는 게 아니라 취향을 근거인 척 하는 겁니다.

이 구분은 팀 안에서도 쓸모가 있습니다. 회의가 공전하는 이유는 대개 두 사람이 다른 종류의 주장을 같은 강도로 밀고 있어서입니다. 한 쪽은 근거를 대고 있고 한 쪽은 취향을 대고 있는데, 둘 다 "제 생각에는"으로 시작하니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럴 땐 한 문장이면 풀립니다. "지금 근거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선호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보호하는 질문입니다. 선호라고 답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없는 근거를 지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안목이 자라는 팀은 이 둘을 섞지 않는 팀입니다.

결국 안목은 남보다 좋은 걸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가 고른 것을 나중에 설명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시안이 많아질수록 그 상태를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이제야 이게 역량으로 불리기 시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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