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안목이란: taste를 취향이 아니라 안목으로 옮기는 이유
taste를 취향으로 옮기면 책임이 사라집니다. 안목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과대평가 논란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훈련하고 기록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영어권 디자인 글에서 taste라는 단어가 부쩍 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로 올 때 대부분 '취향'으로 번역됩니다.
이 번역이 어색한 건 아닙니다. 사전적으로는 맞습니다. 문제는 번역 과정에서 책임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취향은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저는 민트초코를 좋아해요"에 대고 "근거가 뭔가요"라고 묻는 건 무례입니다. 그런데 실무에서 시안 두 개 중 하나를 고를 때는 그 질문이 당연합니다. 답할 수 없으면 그건 판단이 아니라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taste를 안목으로 옮기자는 제안이고, 더 중요하게는 그 안목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취향으로 옮기면 사라지는 것
두 단어의 차이를 문장으로 놓고 보면 선명합니다.
취향은 "나는 이 색이 좋아요"까지 말합니다. 안목은 "이 색이 지금 이 사용자에게, 이 브랜드에서, 이 예산으로 왜 더 맞는지"까지 말합니다. 뒤쪽은 틀릴 수 있고, 틀렸을 때 배울 것이 남습니다.
안목은 또한 옵션이 아니라 직무에 가깝습니다. 취향은 남이 반박할 수 없지만, 안목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박 가능하다는 건 진지한 주장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어에 이미 있는 단어라는 점도 좋습니다. 안목은 예술품을 감정하는 사람,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쓰던 말입니다. 둘 다 축적된 기준으로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게 정확히 지금 필요한 능력입니다.
안목은 예쁨의 순위가 아닙니다
가장 흔한 오해를 먼저 치우겠습니다. 안목이 좋다는 건 더 예쁜 걸 고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제품 화면은 미적 완성도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글자가 읽히는지, 다음 행동이 보이는지, 낯선 사용자가 실수에서 회복할 수 있는지, 구현과 운영에 견딜 수 있는지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안목은 감각보다 기억에 가깝습니다. 사용자 리서치에서 배운 것, 실패한 실험, 다른 제품을 뜯어 본 경험, 브랜드와 기술의 제약을 동시에 꺼내 놓는 능력입니다. 재능이 아니라 재고입니다.
수치로 본 안목의 자리
2026년 AI in Design 리포트에 흥미로운 분포가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무엇을 AI에게 넘기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 응답자의 약 80%가 시각적 완성도는 AI 제안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답했습니다.
- 사용자 니즈, 문제 정의, 스토리텔링은 60~70%가 자기 판단에 의존합니다.
- 반면 76%가 AI 코딩 도구를 쓰고, 50%는 생성된 코드를 프로덕션까지 내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생산은 넘기고 판단은 붙듭니다. 자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넘겨보니 안 되더라는 쪽에 가까울 겁니다.
같은 조사에 불편한 숫자도 있습니다. 9%는 AI의 기여와 자기 기여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결과물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느끼는 응답은 40%에 그쳤습니다.
이 9%가 안목이 무너지는 지점입니다. 안목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쌓이는데, 무엇을 왜 골랐는지 모르면 반복이 축적이 되지 않습니다. 일은 끝나는데 사람은 안 느는 상태입니다.
AI의 평균과 생각의 고착
생성 AI는 익숙한 패턴을 빨리 조합하는 데 강합니다. 대가로 결과가 서로 비슷해집니다.
2026년 AI 생성 랜딩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보면 거의 동일합니다. 보라색 그라디언트, Inter, 둥근 카드, 3열 그리드. 모델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 '많이 있는 디자인'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첫 결과가 사고의 범위를 좁혀버립니다. 디자인 고착(design fix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인데, 오래전부터 알려진 것이지만 AI 도구가 이걸 구조적으로 증폭합니다. 백지 앞에서는 열 방향을 떠올리던 사람이, 완성도 70%짜리 시안을 받으면 그 시안의 변형 세 개만 생각합니다.
안목은 여기서 구체적인 효능을 가집니다. 첫 안을 거절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도 "별로예요"가 아니라 이유를 붙여서요.
- "예쁘긴 한데 처음 오는 사람이 이 기능이 뭔지 알 방법이 없어요."
- "브랜드가 약속한 간결함보다 장식이 앞서 있어요."
- "오류 상황인데 카피가 너무 단정적이에요.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걸 확신하는 투로 말하고 있어요."
이 세 문장은 모두 반박 가능합니다. 그게 취향과의 차이입니다.
반론: 안목은 과대평가된 것 아닌가
짚고 가야 할 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첫째, 안목은 쉽게 게이트키핑 도구가 됩니다. "그건 안목이 없는 선택이에요"라는 말은 근거 없이 권위만으로 무엇이든 기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특정 문화권·계층의 미감을 보편 기준인 것처럼 내세우기도 쉽습니다.
둘째, 추상적이어서 평가가 안 됩니다. 채용 공고에 "taste가 있는 분"이라고 쓰면 지원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심사자도 결국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고르게 됩니다.
셋째, 형식만 베끼기 쉬운 개념입니다. Dieter Rams가 "적지만 더 나은"을 말했을 때 그건 절제를 표현할 어휘가 없던 산업 안에서 전후 독일 소비자의 심리를 읽은 결과였습니다. 그 맥락 없이 회색 배경과 여백만 가져오면 그건 안목이 아니라 유행입니다.
반론을 수용하면 결론이 달라집니다. 안목은 가졌거나 없는 질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기준의 집합으로 다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안목은 실제로 계급장이고, 설명할 수 있는 안목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안목을 훈련하는 방법
"좋은 걸 많이 보세요"는 조언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적어보겠습니다.
네 가지 질문을 매번 통과시키기
시안을 본 다음 '좋다/별로다'로 끝내지 않고 이 네 가지에 답해봅니다.
- 누구에게 어떤 순간에 쓰이는가
- 사용자의 다음 행동을 더 쉽게 만드는가
- 브랜드의 말과 시각 언어에 맞는가
- 이 선택의 비용과 위험은 무엇인가
네 번째를 빼먹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그게 보통 실무에서 가장 빨리 문제가 됩니다.
주 1회, 제약을 추정하는 연습
좋아 보이는 화면을 하나 골라 "왜 이렇게 됐을까"를 역으로 추정해 봅니다. 어떤 지표를 보고 이 버튼을 위로 올렸을까, 왜 이 정보를 숨겼을까, 어떤 법무 요구 때문에 이 문구가 어색할까.
이 연습이 리디자인보다 훨씬 낫습니다. 리디자인은 제약을 모른 채 예쁘게 만드는 연습이라 오히려 AI가 잘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틀린 예측을 기록하기
안목이 자라는 건 맞혔을 때가 아니라 틀렸을 때입니다. "이 방안이 더 잘 될 거라고 봤는데 아니었다"를 적어두면 기준이 수정됩니다. 적지 않으면 기억이 결과에 맞춰 조용히 재구성됩니다.
안목을 조직의 자산으로 바꾸기
개인 안에만 있는 안목은 그 사람이 나가면 같이 나갑니다. 더구나 에이전트가 화면을 만드는 환경에서는 문서화되지 않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싸게 먹히는 방법은 결정 하나당 세 줄을 남기는 겁니다.
- 무엇을 골랐는가
- 무엇을 버렸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 기준은 언제 다시 보아야 하는가
두 번째 줄이 핵심입니다. 채택된 안은 화면으로 남지만 버려진 안과 그 이유는 아무 데에도 남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팀은 이미 기각한 안을 다시 꺼내 논의합니다.
이게 디자인 시스템 문서와 붙으면 더 강해집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는지는 2026년 UX 디자이너 역량 7가지의 시스템 사고 항목에 이어서 적었습니다.
안목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저는 안목이 없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보통은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 판단을 말로 풀어본 적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금방 고쳐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화면을 하나 고르고, 왜 마음에 안 드는지를 두 문장으로 써보면 됩니다. 처음엔 "촌스러워서" 같은 말밖에 안 나옵니다. 열 번쯤 쓰면 "정보 위계가 세 단계인데 시각적으로는 두 단계로만 구분돼 있어서" 정도가 나옵니다.
그 변화가 안목입니다. 감각이 예민해진 게 아니라 언어가 생긴 겁니다.
AI가 시안을 무한히 내는 환경에서 이 언어는 더 빨리 필요해집니다. 열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하루에 여러 번 생기기 때문입니다. 왜 이게 나은지 매번 설명하지 못하면, 선택은 결국 맨 위에 뜨는 것으로 정해집니다.
안목과 취향이 충돌할 때
현실에서 제일 곤란한 상황입니다. 내가 더 좋다고 느끼는 안과, 지금 사용자에게 더 맞는 안이 다를 때입니다.
정답은 싱겁습니다. 제품에서는 사용자 쪽이 이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입니다. 진 취향을 버리지 말고 기록해두세요. "나는 이쪽이 더 좋았는데 이런 이유로 저쪽을 골랐다"를 남기면, 나중에 그 선택이 틀렸을 때 무엇을 재검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취향을 계속 지우기만 하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몇 년간 무난한 선택만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 방향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난함은 안전하지만 안목을 키우지는 않습니다. 틀릴 여지가 있는 선택만이 데이터를 남깁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이렇게 갈라 쓰는 게 편합니다. 사용자에게 직접 닿는 결정은 근거로 하고, 근거가 비기는 지점에서는 취향으로 채우되 취향으로 채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취향을 쓰는 게 아니라 취향을 근거인 척 하는 겁니다.
이 구분은 팀 안에서도 쓸모가 있습니다. 회의가 공전하는 이유는 대개 두 사람이 다른 종류의 주장을 같은 강도로 밀고 있어서입니다. 한 쪽은 근거를 대고 있고 한 쪽은 취향을 대고 있는데, 둘 다 "제 생각에는"으로 시작하니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럴 땐 한 문장이면 풀립니다. "지금 근거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선호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보호하는 질문입니다. 선호라고 답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없는 근거를 지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안목이 자라는 팀은 이 둘을 섞지 않는 팀입니다.
결국 안목은 남보다 좋은 걸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가 고른 것을 나중에 설명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시안이 많아질수록 그 상태를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이제야 이게 역량으로 불리기 시작한 겁니다.